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만주 전략 공세 작전/작전 경과 (문단 편집) === 제15군의 공세 === 푸르카예프 대장은 S.K 맘모노프 중장의 제15군에 주공을 맡겼다. 제15군은 아무르 분함대와 함께 숭아리강 입구에서 아무르 강을 도하해 숭아리강 일대와 푸친 요새 지대에서 일본군을 물리치고 주력 병력을 후친으로 진격시켜 숭아리강 동안을 확보할 것이었다. 그 이후 지무쓰와 하얼빈으로 가는 돌파구를 확보할 것이었다. 이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서 제15군은 3개 소총병사단, 1개 요새주둔군, 3개 전차여단을 배속받아 총 1,433문의 야포와 박격포, 방사포 18문, 그리고 전차와 자주포 164대를 확보하게 되었다. 푸르카예프는 제15군에 일본군 특화점을 제압할 대대적인 화력 지원을 명령했다. 15군 소속 제52, 145, 1120포병연대는 아무르 분함대의 소형 포함, 경비정과 함께 아무르강 너머로 포화를 퍼부을 것이었다. 총 12개 포병연대와 1개 대전차여단, 1개 방공사단, 1개 방공연대, 4개 방공대대가 제15군의 부차적인 진격을 지원할 것이었다. 포병들의 화망 형성 내에서도 제15군은 좋지 않은 도로 사정 때문에 기갑 장비들을 크게 활용하지는 못할 것이었다. 제10항공군이 제15군의 공격을 하늘에서 지원할 것이었다.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제15군도 대대적인 공병 지원을 받아야 했다. 아무르 강 도하와 일본군 초소 제압에는 공병이 필수적이었다. 이를 위해 1개 차량화전투공병여단, 2개 공병대대, 1개 도하대대가 제15군이 배속되었다. 3달 동안, 공병들은 266킬로미터에 이르는 도로를 새로 만들고 1,417킬로미터의 도로를 보수했다. 15군 공병들은 아무르강에 3개의 도하점도 만들고 도하점을 숨기기 위한 위장막도 제작했다. 아무르강과 송화강을 장악하기 위해서, 극동전략방면사령부는 아무르 분함대를 제2극동 전선군에 배속했다. N.V 안토노프 해군 소장의 아무르 분함대는 하바로프스크에 본부를 두고 아무르강에서 작전을 벌일 경비정, [[모니터함]], 기뢰부설함, 소해정 등을 3개 전대 규모로 구성하고 있었으며 육상 작전을 담당할 해군육전대도 가지고 있었다. 푸르카에프는 대부분의 분함대 병력을 제15군에 배속시켰다. 그리고 제45전투기연대가 제15군을 근접지원하게 했다. 맘모노프의 작전 계획은 다른 야전군의 작전 계획과 엇비슷했다. 맘모노프는 주공을 송화강 축선에서 두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송화강을 넘어 진격해 들어갈 것이었다. 제361, 제388소총병사단이 군 대열 중앙에서 주공이 될 것이었다. 아무르 분함대의 제1전대가 레닌스코예와 보스크레센스코예에서 시작될 도하를 근접지원할 것이었다. 도하가 끝나고 다리가 확보되면 2개 사단은 제171전차여단을 선견대로 세워 퉁치앙을 점령하고 숭아리강 동안을 따라 푸친으로 진격한 후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지무쓰를 공격할 것이었다. 군의 좌익에서는 제2전대가 제630소총병연대를 니즈네-스파스코예 축선에서 수성해 후얀과 다른 아무르 강 남안의 일본군 화점들을 소탕할 것이었다. 우익에서는 제34소총병사단, 제203전차여단, 제102요새주둔군이 제1전대의 지원 아래 함께 블라고슬로벤노예에서 강을 건너 남쪽으로 진격해 로페이와 지무쓰 사이의 일본군 화점을 공격할 것이었다. 궁극적으로 제34소총병사단은 지무쓰를 북쪽과 동쪽에서 공격하면서 주공과 합류할 것이었다. 8월 8일 저녁, 제15군 병력이 도하점에 다 도착했다. 공세를 지원하기 위해 제1전대는 레닌스코예에, 제2전대는 니즈네-스파스코에에 주둔했다. 맘모노프는 레닌스코예에서 제1전대의 지휘권을 인수받았다. 아무르강 남안의 일본군을 정리하기 위해 50분의 준비 포격이 준비되었다. 8월 9일 0100시, 제15군 병력들이 아무르 강 너머의 일본군 초소들을 죄다 정리하고 선두 대대들과 수색 부대들을 보트에 태워 도하시키기 시작했다. 강을 건너던 소련군은 강 남쪽의 일본군이 점령한 타르타르 섬에 상륙했다. 타르타르 섬은 아무르강의 요지로 송화강으로 가는 입구에 있어서 일본군의 강 방어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아무르 분함대 제1전대는 제393소총병사단의 제2대대를 타르타르 섬에 상륙시켰다. 공격 신호인 붉은 신호탄이 오르자 소련군은 비속에서 섬에 상륙했다. 0800시까지 일본군의 저항을 물리친 제2대대는 섬의 일본군 초소들을 점령하고 섬을 완전히 확보했다. 밤새도록 다른 대대들이 아무르 분함대 소속 함선들에 실려서 아무르강의 중요한 섬들을 장악했다. 주공이 진행되는 동안 소련군은 강 남안으로 도하할 발판을 마련했다. 제1전대는 제394소총병연대의 강화된 대대들을 강 남안으로 상륙시켰다. 밤새도록 이 대대들은 산툰의 일본군 주둔지를 기습하며 퉁치앙으로 진격했다. 한편 일본군은 이 지역에서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고 대부분의 병력이 빠져 있는 터였다. 그래서 오직 약간의 일본군과 만주국군만이 소련군에게 저항했다. 8월 9일 밤 내내 아무르 분함대의 함선들과 바지선들이 제361소총병사단을 산툰과 퉁치앙으로 가는 길로 날랐다. 제361소총병사단의 좌익에서는 제388소총병사단의 2개 연대가 강 남쪽 둑에서 도하하고 있었다. 도하 작전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은 제1전대가 맡아야 했는데 특히 중장비 도하에 신경을 써야 했다. 바지선 1척 당 60톤 이상은 싣을 수 없었다. 제1전대는 중장비 도하를 위해 4가지 운송 방법을 썼는데 T-34 1대와 [[T-26]] 2대, T-34s 2대, T-26s 4대, T-34 1대와 트럭 3대를 같이 나르는 것이었다. 그런데 만주 전역에서는 전차의 종류를 가급적 통일함이 보급과 전투에 유리하지만 이 항목을 보면 이상하게도 [[BT]]-7이나 T-26 같은 구형 전차들이 의외로 많이 투입되었는데 시베리아에 쌓아 놨던 2선급 차장물자들로 보인다. 그러나 비가 쏟아지면서 도하작업에 계속 차질이 생겨 중장비 도하는 5시간이 소요되었다. 이 상태로 가다가는 2~3일 동안에도 1개 전차여단 분량의 기갑장비만을 도하시킬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어 제171전차여단의 경우 도하에 30시간이 걸렸다. 이 시간 동안에도 여단의 선두 전차들은 100킬로미터 이상 진격해야 했다. 결국 제171전차여단이 사단 선견대 역할을 제대로 하려면 더 많고 지속적인 지원이 필요했다. 아무르 강 근처에서 징집된 증기선들도 도하작전에 동원되었다. 증기선 아스트라한, 그로즈니, 돈바스, 코키난키, 소르모우어와 기타 소형 선박들이 물자와 병력을 실어 날랐고 증기선 치체린, 오스트러우스키, 키로우는 병원선으로 개조되어 부상병들을 강 북안으로 수송했다. 아무르 강에 대한 3개의 도하점이 모두 구축되자 제15군 사령부는 각 도하점의 병력을 작전 집단으로 임시 편성했다. 도하작전은 어려웠지만 소련군의 주력 병력들은 8월 10일 아침까지 모두 아무르 강 도하에 성공했다. 주공 방향인 퉁치앙 마을로 소련 경비정들이 함포를 쏘며 일본군 집결지를 공격했다. 제361소총병사단이 마을에 돌입하자 마을의 일본군은 푸친 요새 지대로 후퇴했다. 퉁치앙이 확보되자 제361, 388소총병사단은 재집결한 후 남쪽의 후친 요새지대로 향했다. 제171전차여단은 기타 지원 제대들을 후방에 두고 땅크 데산트들을 전차에 태운 뒤 남쪽으로 진격했다. 1500시에 맘모노프는 제361소총병사단과 아무르 분함대에 푸친으로 진격해 푸친 시를 11일 0800시까지 확보하라고 명령했다. 맘모노프는 제361소총병사단과 제1전대에 2개의 강화된 소총병대대와 강습소총병중대를 푸친에 가까운 송화강 동안에 상륙시킬 것을 지시했다. 이 공격부대는 푸친에 대해 제171전차여단과 제361소총병사단의 선두 병력들과 북쪽에서부터 도시를 협격할 것이었다. 시간이 부족하다는 것이 계획의 가장 큰 문제였다. 소련군은 수륙 양면 합동공격을 위해 더 기술적인 방법을 써야 했다. 제1전대는 2개의 해군육전대 제대를 상륙을 위해 배치했다. 해군육전대 정찰 병력은 모니터함과 무장한 경비정과 기뢰부설선이었다. 엄호 부대는 모니터함 2척과 무장 경비정 3척이었다. 정찰 부대는 일본군 위치들을 관측하고는 제1투입 병력을 상륙 위치에 상륙시켰다. 엄호 부대는 15킬로미터 뒤에서 최초 투입 병력을 지원하면서 제2투입 병력을 상륙시켰다. 8월 10일 1630시, 정찰 제대가 제364소총병연대 소속 제3대대를 모니터함 원쑨에 태우고 왔으며 강습 부대들은 경비정 3척에 분승하고 왔다. 제345소총병연대의 제1대대는 3시간 후에 상륙했다. 강을 거슬러 올라가던 소련군 함선들은 기뢰를 제거하고 장애물을 피하는데 애를 썼다. 운 좋게도 일본군은 부랴부랴 푸친으로 후퇴하느라 [[기뢰]]나 수중 장애물을 설치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8월 10일 2200시, 선견 부대들이 푸친 북쪽에서 37킬로미터 지점인 투치커우에 닻을 내리고 제345소총병연대의 제1대대를 상륙시켰다. 무장 경비정들은 송화강 남쪽이며 푸친 근처 지역에서 일본군 화점들을 정찰했다. 경비정들은 강 지협을 관측하고 기뢰가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하지만 너무 어두워서 일본군 화점들의 정확한 위치는 파악하지 못했다. 다행히 일본군도 어두워서 경비정들이 정찰을 끝내고 무사히 돌아갈 때 까지 경비정들을 보지 못했다. 정찰 정보를 기반으로 제361소총병사단장은 345소총병연대 제1대대에 강변에서 사단 본대와 합류한 다음 푸친을 향해 육로로 진격할 것을 명령했다. 제2대대와 강습중대는 수륙 양면 공격을 도시 하부에서 실시하며 지상에서 돌입하는 부대와 협격하라고 명령했다. 8월 11일 0700시, 3척의 경비정과 기뢰부설선 1척이 모니터함을 후속하며 푸친에 접근했다. 20분 후 경비정들과 모니터함이 푸친으로 함포 사격을 퍼부었다. 일본군은 박격포와 야포를 가지고 와서 대응했지만 사거리가 닿지 않았는데 그 일본군에는 75밀리 이상의 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르 분함대의 3척의 모니터함인 크라스니보스토크, [[블라디미르 레닌]], [[쑨원]][* 쑨원의 [[중화민국]]과 소련의 협력이 활발해지자 붙인 이름이다.]에는 130밀리 함포가 설치되어 있었으며 경비정에는 소형 다련장로켓포가 설치되어 있었다. 소련 함선들은 130밀리 포와 다련장포로 일본군 방어 거점들을 하나하나 제거해 나갔다. 모니터함은 5개의 콘크리트 화점과 12개의 나무 화점, 6개 박격포 포대, 기타 탄약창 몇 개를 날려버렸고 무장 경비정들은 10개의 화점을 박살냈다. 1시간 동안의 함포 사격이 끝난 후 경비정들이 강습중대를 상륙시켰다. 0830시에는 제3대대가 모니터함 쑨원에서 상륙했다. 병력들은 강변과 도하점을 확보하고 도시로 진격했다. 강습중대와 제3대대는 도시 외곽에서 모니터함의 함포 지원을 받으며 일본군의 강한 저항을 상대했다. 도시의 일본군은 쑹화 해군육전대 제2대대와 제25경비대대, 기타 만주국군 부대로 감시탑에 틀어박혀서 기관총을 쏴 대거나 도시의 건물 창마다 중기관총을 설치하고 시가전을 벌였다. 한편 도시 북쪽에서 제171전차여단의 선두 전차들과 제361소총병사단 병력이 일본군의 저항을 분쇄하고 도시로 진입했다. 0900시 이후 일본군은 푸친 요새 지대를 포기하고 남동쪽으로 탈출해 우얼흐쿨리산 요새 지대로 퇴각하기 시작했다. 최후까지 저항하던 일본군 초소는 1200시에 점령되었다. 제171전차여단 전차들과 제361소총병사단 병력들은 요새화 된 건물 하나하나에 돌입하며 백병전을 벌였다. 8월 11일에 제171여단과 제355소총병연대는 도시 중심을 확보했다. 그날 밤 일본군은 몇 번 역습을 시도했지만 죄다 실패로 돌아갔다. 다음날 날이 밝자 소련군은 모니터함의 함포 지원을 받으며 전날에 점령하지 못했던 지대로 다시 몰려갔다. 마침내, 8월 13일에 제171전차여단과 제361소총병사단은 푸친을 점령했다. 13일 저녁, 일본군의 저항은 완전히 끝났다. 푸친이 소련군의 손에 들어오자 맘모노프는 병력을 지무쓰로 전진시켰다. 송화를 통해 주공이 벌어지는 동안 소련군의 조공이 제15군 정면에서부터 펼쳐지기 시작했다. 제34소총병사단과 제203전차여단이 15군 우익에서 아무르강을 도하하기 시작했다. 다음날 소련군은 로페이-지무쓰 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진격했다. 사단의 본대가 물에 잠긴 도로를 따라 흐싱산첸의 주 요새로 진격하는 동안 사단 좌익 병력은 펜흐시앙의 일본군 요새 지대를 상대하느라 뒤쳐졌다. 대대적인 포격과 폭격이 흐싱샨첸에 쏟아져서 결국 그곳의 일본군이 서쪽의 다른 요새 지대나 지무쓰로 후퇴하게 만들었다. 13일까지 제34소총병사단의 선두 부대들이 리엔치앙커우의 일본군을 남쪽으로 천천히 압박하면서 송화강 북쪽 둑에서 지무쓰로 도하했다. 15군 좌익에서 제388소총병사단의 제630소총병연대가 하바로프스크에서 남서쪽의 아무르 강 남안의 일본군 방어선을 공격했다. 이곳의 가장 중요한 마을은 푸유아안 이었다. 일본군의 방어를 분쇄하기 위해 소련군은 강을 이용해야 했다. 8월 9일 0320시, 포함 프로레탈리와 제2경비정대, 제3기뢰부설대가 니즈네-스파스코예에서 출항해 갑판에 제630소총병연대의 제1대대를 분승해 태우고 나타났다. 모니터함 수에르들로우와 달네우오초츠니니, 콤소몰레츠와 제3경비정대가 푸유안 옆의 말라킨 섬의 일본군 방어망에 함포를 퍼부었다. 말라킨 섬이 정리되고 상륙 병력이 도하점에 접근하자 소련 함선들은 푸유안 요새 지대에 포문을 돌렸다. 상륙한 부대들은 강 부두를 확보하고 도시 동쪽 끝과 서쪽 끝으로 진군했다. 예상 못한 일본군의 저항은 없었지만 제1대대는 일본군의 강한 저항을 상대해야 했다. 제307전투기연대 소속 전투기들이 이곳 하늘을 비행하며 남아 있는 일본군 항공기가 없다는 것을 파악했다. 2개 해군육전대 제대가 제1대대를 지원하며 도시 점령에 합류했다. 0800시 이후 일본군의 저항은 일소되었다. 도시를 확보하자 제1대대는 도시에 주둔해 휴식을 취하며 후속 부대들의 상륙을 기다렸다. 이때 아무르 분함대 제2전대는 강을 거슬러 올라가며 송화강 입구에 도달하며 친텔리, 오투, 케인치의 일본군을 공격했다. 여기서 소련 함선들은 제630소총병연대 제2대대를 상륙시켰다. 제2전대가 친텔리에 1000시에 도착했을 때, 소련 수병들은 친텔리가 전날 밤에 경비정을 타고 기습 상륙한 아군 부대 손에 이미 떨어졌다는 것을 알았다. 포코로브스코에에서 출발한 제3대대 또한 목적지인 오투가 이미 아군 손에 떨어졌다는 것을 보았다. 다시 강을 거슬러 올라가며 제2전대는 케인치에 8월 10일 1925시에 도착했다. 모니터함 달네우오초츠니와 콤소몰레츠가 소총병 중대를 케인치 마을 북쪽에 상륙시킬 동안 모니터함 수에르들로우와 경비정 3척은 케인치 강 입구에 병력을 상륙시켰다. 이 마을에서도 대부분의 일본군이 빠져나간 터라 소수의 일본군만이 경비정들의 로켓포 일제발사음을 들을 수 있었다. 8월 10일이 끝나갈 무렵 제630소총병연대와 제2전대는 하바로프스크에서 송화강 입구에 이르는 200킬로미터의 아무르강 남안을 정리했다. 제2전단은 해군육전대 병력들을 점령한 마을에 주둔시켜 일본군을 소탕하게 했다. 또한 전단 함선들은 추가적인 보급과 보충병들을 레닌스코예에서 실어 날랐다. 8월 13일에 2전대의 임무가 끝나자 아무르 분함대 본부에서는 송화강에서 푸친으로 가는 도중에 제2전대에게 제1전대를 지원할 것을 명령했다. 또한 우수리 소전대의 경비정들과 해군육전대 병력, 지-부레이스크 전대의 모니터함 악티유니와 포함 크라스나야 주에즈다를 푸친에서 제1전대에 합류시킬 것을 명령했다. 소련군의 기습에 직면한 일본 제1방면군 사령부는 8월 9일 저녁에 제134사단 병력을 모두 지무쓰로 철수시키고 할 수 있으면 펭상까지 철수시키라고 명령했다. 8월 12일에는 제134사단의 전 병력이 후방에 만주국군 부대들만 남겨 두고 전부 지무쓰로 후퇴했다. 소련군이 푸친을 점령하고 지무쓰로 진격하자 제134사단은 지무쓰를 제7만주국군 여단에 맡겨 놓고 송화강을 통해 펭상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8월 13일, 푸친에서 제1전대 본부와 제361소총병사단은 지무쓰로 진격할 것을 결정했다. 송화강 남안은 불어난 물로 전부 잠겨 있었다. 공병들의 집중적인 도로 확보 노력에도 불구하고 소련군은 제한적인 공세를 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계속 험한 지형을 돌파하던 제171전차여단의 유류가 부족해지기 시작했다. 이 문제에 직면한 소련군 지휘관들은 송화강을 통해 지무쓰를 공격함으로서 지무쓰를 향한 육상 루트의 일본군을 최소한으로 만들게 하여 일본군 저항을 최소한으로 받을 계획을 세웠다. 아무르 분함대 사령관 N.A 안토노프 소장은 8월 15일에 지무쓰 남쪽 85에서 70킬로미터 남쪽에 제1전단은 쿠호모 호수와 상시첸에 강화된 대대들을 상륙시키고 지무쓰로 투입될 일본군의 이동을 차단하고 제2전대는 지무쓰 근처에 제632소총병연대를 상륙시킬 것을 명령했다. 제1전대 함선들이 제349소총병연대의 2개 대대와 제83소총병연대의 혼성부대를 태우고 강을 거슬러 올라가 2개의 도하점을 향해 나아갔다. 소련군은 그곳에 일본군이 없는 걸 확인했지만 수위가 높아진 강물이 지무쓰로 가는 도로에 범람하고 있는 것을 봤다. 결국 소련군은 지무쓰에서 40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후아추안에 내렸다. 8월 14일, 송화강 북안에서 제34소총병사단과 제203전차여단 전차들이 리엔치앙커우를 점령하고 송화강을 건너 지무쓰로 향했다. 하지만 강 너머의 일본군의 강한 저항 때문에 도하가 계속 힘들어지고 있었다. 제34소총병사단이 송화강 도하에 실패하고 제171전차여단과 제361소총병사단이 느릿느릿 진군하자 제2극동 전선군 사령관 푸르카예프 대장은 아무르 분함대에 지무쓰를 강에서 직접 공격할 것을 명령했다. 그날 저녁, 아무르 분함대의 모든 함선들이 지무쓰로 몰려들었다. 일본군은 강으로 통나무와 불타는 장애물을 던지며 소련 함선들의 접근을 막으려 했다. 소련 함선들은 장애물들을 치우면서 다음 날 아침까지 지무쓰 앞에 도달해 맹렬한 함포 사격을 퍼부었다. 0630시에 제1경비정대가 모니터함 레닌의 지원포격을 받으며 S. M. 쿠즈네초프 대위가 지휘하는 해군육전대 병력을 상륙시켰다. 해군육전대 병사들은 다른 수색부대 병력들과 합세하여 물에 잠긴 도로를 따라 일본군을 압박하며 지무쓰 주재소를 점령했다. 제632소총병연대의 나머지 병력들은 수색부대를 따라 일본군의 산발적인 저항을 물리치며 도시로 돌입했다. 그 동안 만주국군 제7여단이 지무쓰 동쪽의 민갈리로 후퇴해 소련군에게 항복 의사를 밝혔다. 1100시에 제3경비정대가 제632소총병연대 소속 2개기관총중대를 민갈리로 보내 만주국군 3,500명을 인솔하게 했다. 밤이 되자 지무쓰는 완전히 소련군에게 들어왔고 제15군의 주력은 지무쓰에 주둔하여 간만에 휴식을 취하게 되었다. 제34소총병사단은 저항하는 소수의 일본군을 일소하고 도시 북쪽에서 진입해 본대와 합류했다. 잠깐 쉰 제15군은 송화강으로 후퇴하는 제134사단을 추격해 하얼빈으로 향하기 시작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